그리스도를 향한 새 노래 - 안나실 목자

본문 : 빌립보서 2장 6-11절 


  지난 수양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품은 다윗의 영성에 대해 많은 묵상을 하였습니다. 상상하기도 어려운 삶의 위기들 가운데서도 다윗은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했으며, 수 많은 그의 시편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27편 4절에는 평생 소원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그의 간절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다윗이 갈망했던 여호와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가 무엇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며, 어떤 때 아름답다고 말하는지 한 번 살펴볼까요? 우주의 광활함, 밤하늘을 수 놓은 별들, 새벽 이슬, 초록이 피어나는 봄, 형형색색의 꽃들, 저녁 노을, 가을 단풍,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빛, 시원한 바다, 극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오로라, 주렁주렁 달린 열매들, 갓 태어난 아이들, 멋진 그림들, 마음을 울리는 노래들, 우리의 몸이 표현해내는 춤들, 그리고 사랑…… 
말로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에 파 묻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 속에 있거나, 혼자 조용히 기도할 때, 마음 속에서 뭔가를 애써서 갈망하곤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대 자연 앞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성경은 시종일관 하나님이 아름다우신 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광대한 은하계 너머로부터 원자 단위의 극소 세계 안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아름다움을 창조세계의 구조 안에 엮어 두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창조주 앞에 선 피조물로서의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표현하는데 극히 제한적이고 서툴 수 밖에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며 그 거룩한 아름다움에 반응하고자 하는 충동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충동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에 대한 내면의 굶주림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주리고 목이 마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섬기는 분이 바로 아름다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윗이 간구했던 기도와 같은 방식으로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깊이 생각하는 일이 드뭅니다. 더군다나 ‘그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데는 더 인색한지도 모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수 많은 속성들 중 하나를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이 모든 아름다움 위에 뛰어나신 분이라고 결론 지은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 우리는 어림잡아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최고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분명히 압니다. 다윗이 그저 바라기만 했던 바로 그 여호와의 아름다움! 그것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전격적으로 찾아 오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사랑의 발자취입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언어를 뛰어넘는 아름다움 중의 아름다움입니다. 바로 이 한량없는 사랑이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었고, 또 만들어 갑니다. 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는 그분의 아름다움을 더욱 더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갈망 때문에 우리는 다시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이 진정한 예배임을 알고 있었던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시40:3)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144:9)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자 하는 갈망은 그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신 분이신지를 경험케 해주었습니다. 바로 그 감동적인 떨림이 하나님을 향한 ‘새 노래’가 된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자리에는 항상 새 노래가 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은혜 가운데 임할 때 느끼는 감정, 생각, 열망들이 그 이전과 항상 똑 같이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새 노래를 경험하는 것과 같은 감동을 줍니다. 새 노래를 창조한다는 것을 하나님을, 예수님을, 성령님을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새롭게 알아감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찬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달라져감을 의미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매일 성령 하나님과의 친밀한 가운데 들어가지 않으면 이것을 경험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과거 어느 순간에 받은 감동이 전부고, 그 순간의 감격에 그쳐 현재의 삶은 그저 무의미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하지만 매일 매 순간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자 할 때 그 말씀이 나에게 역사하여 알게 되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 희열, 사랑, 그리고 자유 등이 바로 나에게 새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새 노래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의 증거이며,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새 노래로 찬양하라는 말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날마다 새로움을 더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날마다 새로운 역사를 쓰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영이 지나가신 곳에 늘 남게 되는 노래, 새 노래 말입니다. 그분과 친밀함 속에 거하는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생각과 삶 가운데 이 하나님을 향한 열망, 새 노래가 뒤덮일 날을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채 몇 십 년도 지나지 않아 초대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잊기 시작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성경이 그들 손에 쥐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을 기억하기 위한 노래, 진리가 형상화된 노래가 절실히 필요했었습니다. 거짓 선생들이 몰래 들어와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노래를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혼동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인지에 대한 의심도 퍼져 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진정한 의미를 잊어버린 초대교회를 향해 바울은 신학적인 논문이 아닌 단순하고도 심오한 노래를 하나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 분이신지를 기억하도록 돕는 노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노래를 ‘카르멘 크리스티’라고 불렀는데, 라틴어로  ‘그리스도를 향한 찬송’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합창-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6-11) 

그러면 바울이 이 찬송시를 통해 당시의 성도들에게 무엇을 이해시키고자 했을까요? 또 오늘날 우리들은 이 찬송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기억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이 찬송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신 것을 기술적인 용어와 개념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성육신은 사랑의 행위였고, 신비였습니다. 6-8절은 예수님이 “자기를 비어” 내신 것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이야기 합니다. 마치 노래에서 단조처럼 음울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9절에서 비로서 이 노래는 기쁨이 넘치는 찬송이 터지면서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고백하는 장조의 합창으로 조 옮김을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8절의 예수님의 전적인 순종에서 비롯됩니다. ‘전적인 순종’이란 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대신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자신을 비우시는 겸손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대속물로 자신을 주시는 섬김의 본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전적인 순종으로 인해 보잘 것 없어 보였던 예수님은 마침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로부터 주라 일컬음을 받는 주권과 찬송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찬송시가 어느 특정 개인과 상관없는 말씀이니 그저 암송만 하고 곡조가 붙으면 찬양만 해도 된다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혹 그런 자들이 있을까봐 바울은 이 찬송 서문에 이렇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삶의 모범이 우리 삶에도 똑 같이 적용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찬송시를 통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드러내 보이신 섬김과 겸손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종이 되라고 명령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 말씀하신 것들을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11절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는 ‘새 노래’가 아닙니다. 이미 바울이 빌립보 교회들에게 들려줄 때에 오늘의 우리도 포함되어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그리스도를 향한 찬송’은 오늘 우리에게 ‘새 노래’입니다. 영원히 기억하고, 영원히 불러져야 할 ‘새 노래’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우리는 일 년 중 오늘 하루만 부활을 기념하지 않습니다. 매 주일이 우리에게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날이 부활절이 아닙니다. 부활의 승리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전적인 순종하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모범, 그 겸손과 섬김과 그리고 전적인 순종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가운데 펼쳐지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주님의 부활을 가장 잘 기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