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유산을 남기는 교회 - 안나실 목자

오늘날 사회의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는 ‘미래’입니다. 국가나 기업을 비롯한 기관에서 미래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핵심 단어가 ‘다음 세대’입니다. 요즈음 이슈가 되고 있는 청년 실업과 연금 문제도 ‘미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세기에 영적으로 부흥기를 경험했던 미국이나 한국은 이제 영적 침체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미래학자 최윤식 교수의 말에 의하면 2050-2060년이 되면, 한국 기독교인이 300-400만 정도로 감소할 것이며, 그 가운데 다음 세대는 30-40만대로 줄어들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과거에는 ‘미국=기독교 국가’라고 할 만큼 종교 공식이 성립되었었지만 이제는 그 공식이 깨어졌습니다. 지난 5월 12일 퓨 리서치센터가 ‘미국의 종교적 지형 변화’ 결과를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개신교와 카톨릭의 인구는 계속 하락세인 반면 무 종교인 그룹은 계속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미국인의 약 70%가 자신을 기독교인(개신교와 카톨릭 포함)이라고 답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종교사회학계에서는 지금을 ‘영적이지만 종교적인지 않은 현상’(spiritual but not religious)이라고 합니다. 이는 절대자를 믿고 싶은 내면의 영적 욕구는 여전히 있지만 이름만 기독교이고, 종교만 기독교이어서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매우 약한 것을 지적해서 한 말입니다. 
이 자료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기독교는 늙어가는데 비해 타 종교나 무 종교인은 젊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신교의 평균 나이는 50세이고, 카톨릭은 49세, 무 종교인 그룹은 36세입니다. 미국 내에서 가장 젊은 종교는 무슬림으로 평균 연령이 33세이며, 불교는 39세, 힌두교는 33세라고 합니다. 젊은 층 사이에서 요가와 명상 등이 유행하면서 힌두교와 불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렇게 젊은 세대가 점점 이탈하고, 오는 사람보다 떠나가는 사람이 많아 어찌되었든 기독교의 미래가 암울해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면에서 미국의 기독교가 위험한 수준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상대주의와 다양성이 특징인 포스트 모더니즘의 철학과 사상이 남긴 부작용 중의 하나인 ‘may be(아마도…글쎄요)’ 세대의 등장입니다. 한 원 안에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고 한다면 진짜 중심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오늘날의 시대의 사조가 정확하고 분명한 것들을 흐려 놓았으니 모든 것에 ‘may be’라고 반응을 보이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의 ‘may be’는 내 것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는 것으로 오히려 좋게 평가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리 앞에서도 그렇게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개인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분명할 뿐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기에 진리입니다. 그래서 진리 앞에서는 ‘예’(Yes)나, ‘아니오’(No)의 분명한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는데도 이 시대는 진리 앞에서도 ‘아마도…글쎄요’(May be) 라고 반응을 보입니다. 한 예로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남성과 여성의 경계선이 불분명해진 것을 시작으로 이제는 가정이, 나아가 사회에 대한 정의가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쳐야 할 교회가 세상 속에 있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도리어 교회 속에 세상이 들어와 그 유행과 풍조를 너무 많이 받아들인 결과 스스로 정화할 능력마저 상실하여 이제는 교회의 정의마저 바뀔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무신 교육이 난무하고, 황금 만능의 세상 가치가 사람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영적 관심보다 앞선 물질 과학 문명을 추구하는 성공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기록된 대로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역사하는 곳이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영적 성숙이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종교적 행위는 있어도 영성이 없습니다. 성경과 교리에 대한 지식은 있어도 신앙의 인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알아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신앙은 있어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므로 실제 삶에 적용되는 신앙은 없습니다. 
교회를 그렇게 오래 다니고도 말씀을 너무 모릅니다. 매주 그렇게 설교를 많이 듣고 성경공부도 많이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말씀만 나오면 막막해 합니다. 들으면 다 아는 소리 같은데 제대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막상 누군가에게 가르치려고 하면 모르겠고, 읽은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렇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오죽 하겠습니까? 
400년 동안 애굽의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엄청나고도 놀라운 능력으로 탈출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사사기 2장 7절에 보니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고, 10절에 보니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앙이 필요 없고 세상적인 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이스라엘 후손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그분의 행하신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1-12절에 보니 그들은 결국 여호와를 떠나 버렸고, 나아가 다른 신들을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역사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던 이스라엘에서도 한 세대가 지나니 다음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고, 기억하지 못했고, 결국 떠났습니다. 이처럼 다음 세대는 여호와를,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이 삶의 기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성숙에 따른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며, 오히려 신앙 때문에 갈등을 겪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이 즐거움이나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사회나 학교에서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고 감당하지도 못합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영적 부흥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오늘날처럼 문명의 혜택이 없고,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믿음에 있어서 만큼은 부요한 삶을 살았습니다. 저의 부모 세대들이 진리 앞에서 ‘예’ 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며 자랐기 때문에 저도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더 알고 싶어서 신학교에 갔고, 더 알게 되니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지금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두 자녀를 낳아 키워보니 자녀를 믿음 안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 
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볼 때 부모가 풍족하게 잘 해 주지 못해 불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도 크지만 분명한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만큼은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역자의 삶을 살지 않았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올해 태어난 예나, 리암, 루비! 갓 낳은 자녀를 볼 때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지요. 그래서 자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자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간이라도 떼어줄 요량으로 다 들어주고 싶지요. 그리고 내 아이는 이렇게, 저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웬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가 여러분의 가슴에 큰 대못을 박게 될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더 이상 신앙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시기만을 바라며 눈물만 흘릴 것입니까? 아니면 신앙 교육은 교회의 책임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만 할 것입니까?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에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에요”라는 주제로 어린이 여름 성경학교를 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과 친구처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번 한 번의 가르침으로 그렇게 될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몇 안 되는 아이들이지만 소홀히 여기지 않고, 한 아이를 통해 돌아올 수 많은 영혼들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잘 키우자고 교사들에게 당부하며 함께 기도하고 준비하였습니다. 
부모들도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정작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신앙교육은 뒤로 제쳐두게 되지요.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보다 인간 관계가 더 우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보다 세상의 실력을 쌓는 것이 더 앞세우는 현실 말입니다. 상황을 이해 못해서가 아닙니다. 또 누가 이해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는 항상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때마다 신앙교육이 뒤로 쳐진다면 과연 아이들은 여호와 신앙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하며 자라게 될까요? 또 부모들이 예배를 소홀히 하면 과연 아이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게 될까요? 또 우리들의 예배하는 모습 속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부모들이 집에서 성경을 읽지도 않고, 기도를 하지도 않고, 찬양을 하지도 않는데 아이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까요? 말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는 종교적인 형식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호되게 꾸짖으셨는데 그 7개의 ‘경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3, 15, 16, 23, 25, 27, 29절에 “Woe to you(화 있을진저)”로 시작되는 말씀들입니다. 
 27절에 보니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 칠한 무덤 같다”고 하셨습니다. 무덤이 겉은 석회를 발라 보기엔 
아름답게 보이나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것처럼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지만 안으로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한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겉만 강조하는 그들에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속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내용을 강조합니다. 거기까진 좋은데 지나쳐서 형식은 아무렇게나 하더라도 내용이 좋으면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즉 물질의 십일조를 드리되 의(Justice)와 인(Mercy)과 신(Faithfulness)을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무슨 말입니까? 형식을 내용보다 앞세우지 말고, 내용이 중요하다고 형식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국은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십계명이 미 헌법의 기초가 되었었는데 이제는 아닙니다. 간음죄가 폐지되었습니다. 동성 결혼이 정당하다고 선언했습니다. 미국의 승리라고 축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불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큰 죄악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국가 기도의 날에 한 공군 장군이 자신의 성공 비결은 “하나님을 의지한 결과”라고 말하면서 청중들에게 “미국의 보안을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들과 군인들을 위해, 그들이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것을 문제 삼아 이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라는 죄목으로 소송을 당했고, 또 한 여 해병이 자신의 책상 위에 성경구절을 붙여 놓은 것이 문제가 되어 소송을 당했다고 합니다. 물론 앞의 사건은 10만 명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며 서명하여 무죄로 판정이 났고, 후자의 사건을 위해서 서명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앞으로 그리스도인인 군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마음대로 표현조차 하는 것을 꺼려할 것이 분명해 보이지 않습니까?  
이 자유의 땅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학교에서 기도를 못하게 만든 무신론자들은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침묵하도록 협박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이 미국에서 공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수 없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없는 그런 시대가 이미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교회는 더욱 극심한 핍박과 도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날카로움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태도와 감각이 무디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규범이 흐려졌습니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부모들과 어른들의 말을 들으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인지 몰라 혼란스러워 합니다. 세상이 너무 교묘하고 치밀하게 우리의 사고와 가치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태로 보면 교회가 그 험난한 길을 견디어낼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희망적인 기대가 있다면 앞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저 교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목숨을 다해 믿는다는 말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시대 초대 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자신의 신앙을 지켜냈던 시절처럼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미국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는 사역자들은 앞으로 미국에서 교회가 지하교회로 숨어 들어갈 것이라고 한결같이 말합니다. 물론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가 그럴 것입니다. 
사랑하는 늘푸른 교회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맡겨주신 자녀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맡겨 주실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주고 싶습니까? 재산입니까? 얼마나 많은 재산을 물려주면 자녀들이 감사하다고 할까요? 재산을 많이 남겨줄수록 자녀를 망치게 된다는 사실을 인류 역사가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 무엇을 남겨주어야 하겠습니까? 다르게 말해서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유대인의 속담에 '물고기를 한 마리 준다면 하루밖에 살지 못하지만,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면 한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물고기'를 '지식'이란 말과 바꿔놓고 본다면 이 속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식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만이 최고의 수단이 아닙니다. 그 보다 ‘물고기 잡는 방법’인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유대인들의 교육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교육을 받은 자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세계인구의 0.2%밖에 안되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자만 보더라도 30% 이상이 유대인이며, 세계적인 인물 가운데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습니다. 현대 미국 100대 부호 중 20%가 유대인으로 그들의 안식일에는 미국 주식시장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미국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좋은 학군, 좋은 대학을 나와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본은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잠1:7;9:10)’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고 연구하니 인생의 이치를 배우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로 사랑하는 늘푸른 가족 여러분, 
 우리가 머물러 살고 있는 이 땅, 미국의 기독교는 정말로 위험한 수준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삶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조정해야 합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거야’라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부모라면 자녀들이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남은 인생의 과제임을 잊지 맙시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들이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도록 도와줍시다. 아니 부모 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보여줍시다. 먼 훗날 자녀들이 부모를 통해 믿음의 유산을 물려 받은 것을 가장 감사하게 여기는 고백들이 터져 나올 수 있도록 그런 인생을 살아갑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한 사람’, ‘한 교회’를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