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믿음으로

엡2:8,9절 / 은혜와 믿음으로 사는 것 

오늘은 은혜와 믿음으로 사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2주 전에 당분간 주일에 열왕기를 중심으로 설교할 것을 예고했는데, 9,10월 새가족전도 중이라 복음과 믿음이런 주제로 말씀을 드릴 필요가 있어서 열왕기 강해설교는 좀 미뤘습니다. 

사람의 습성인지, 구약의 영향 때문인지, 대부분 교인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율법으로 시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교회 다니기 시작한 후 상당기간 동안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지 판단하곤 했습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주는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와 사랑이라고 깨닫은 지금도 나도 모르게 율법의 행위로 평가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 때마다 그러지 말라고 저를 타이릅니다. 

법과 규칙을 만드는 것은 서로 안전하게 잘 지내려고 그러는 것이지만, 의도와 달리 결과적으로 관계를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규정이 없으면 규정을 어기는 일도 없는데, 그 규정 때문에 위반자가 되고, 위반했으니 또 뭔가 제제를 가해야 하고 그렇게 됩니다. 율법도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율법폐기론이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무정부상태의 혼란과 위험을 생각하면 세상에선 법과 규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율법의 타율적 강제력이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법과 규칙은 타율적 강제력입니다. 율법에 의한 하나님과의 관계도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성경을 봐도 하나님이 뭘 하지 말라거나 하라거나 율법으로 규정해 놓은 것을 기뻐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지킨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불평하며 억지로 따르다가 나중에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어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관계에서도 율법에 의한 타율적 규제로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좋아하고 사랑하는 그런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 율법을 주신 하나님과 율법을 지켜야 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위엄에 눌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이 커져서 율법을 범합니다. 그러면 참다 못한 하나님은 벌을 내리십니다. 노아 홍수 사건, 소돔의 멸망, 바벨탑을 쌓다가 흩어진 이야기,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며 죽어간 일들, 왕좌가 사울에게서 다윗으로 넘어간 것, 솔로몬의 실정과 남북으로 분열, 남북 왕국의 멸망과 사로잡혀간 사건들, 모두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결과였습니다. 

구약에 묘사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놓고 볼 때, 하나님께서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을 기대하면서 이스라엘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라면 하나님이 틀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정도를 몰라서 틀리실 분이 아니시잖습니까? 구약성경만 놓고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 백성답게 거룩하게 살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가서, 특히 로마서를 놓고 보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를 깨닫고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한 것으로 나옵니다. 

자녀들이 지켜야할 규칙을 많이 만드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부모가 편하려고 그런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자녀들을 위한 것이죠. 하지만 그런 제한 규정들이 자녀들에게 유익하기보다는 나쁜 영향을 더줍니다.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못하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라고 그러면  억지로 하거나 하는 것처럼 속이려고 할 게 아닙니까? 그리고 하루 빨리 이런 집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야지 그런 마음이 생겨나게 만들어 부모와 자녀 관계가 겉돌게 만듭니다. 어린 자녀들엑 좋은 습관을 만들어 주고 싶더라도 일방적 규정보다는 융통성이 있는 합의로 해야 좋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인 신앙생활도 율법을 들이데며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해롭습니다. 예컨데 주일을 잘 지키자는 뜻으로 하는 말이라도,  안식일 준수를 언급하면서 주일성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 권면은 아닙니다.  주일에 교회당에 와서 예배드리는 힘은 율법의 외압이 아니라 은혜를 아는 마음에서 나오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외부의 압력으로 억지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시겠습니까?  

말라기 선지자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그 당시 유다백성들이 성전에 나가서 제사드리는 것을 매우 귀찮게 여겼고, 더러운 떡을 제단에 올리고, 눈멀고 다리절고 병든 것을 가져다 제물로 드리고, 하나님을 섬겨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 악인들이 더 잘 살고 있지 않느냐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으면 좋겠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않으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도 받지 않겠다”고 하셨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이렇게 됩니까? 은혜를 아는 마음은 없어지고 율법주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따라 신앙생활하지 않으면 우리도 쉽게 매너리즘에 빠진 종교인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내 인격이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은혜를 아는 마음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으며 말씀을 붙잡고 가야 육신의 욕망도 이기고 세상의 유혹도 이기고 시험과 환란도 견디고  마귀의 유혹도 이겨내며 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구원얻은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주는 분이 처지가 딱한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커서 아무런 대가 없이 주시는 선물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은혜라는 단어는 대부분 구원과 관련해서 사용됩니다. 바울 사도 역시예수 믿어 구원얻었다는 뜻으로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할 때, 신앙생활의 시작부터 끝까지 지속하게 하는 힘은 바로 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주어 예수 믿어 구원얻도록 해주신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세상 사는 내 형편이 어떠하든 감사하며 즐겁게 교회다니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믿음이라는 단어와 주로 함께 사용됩니다.  은혜와 관련해서 믿음은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으로’는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두번째는 믿음 그 자체도 내 지력이나 노력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철저하게 인간의 어떤 역할이나 힘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라고 말할 때는 철저하게 나의 힘과 능력, 나의 노력과 공로를 부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은혜를 말하고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부족하다, 능력이 없다고 자신을 탓하거나 낙심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은혜로, 믿음으로 라는 말이 이미 나는 힘과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바를 성취하시기를 간구하는 고백입니다. 이 때 우리의 역할은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에 시키는데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간 직후 처음 정복할 대상이 여리고성이었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은 여리고 성에 거주하는 적군이 월등하게 강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 40년에 지친 오합지졸 민병대수준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여리고성을 정복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병대가 한 것이라고는 성 주위를 돈 게 전부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제사장이 앞서 나팔을 불고 바로 이어 언약궤를 메고 따르고 그 다음 모든 군사들이 줄을 지어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를 돌고 7일 째는 일곱번 돌게 했습니다. 누가 봐도 이건 무슨 군사전략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심리전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이 가나안 정복 전쟁이 이스라엘 군사들의 힘으로 치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앞서 행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우쳐주려는 하나님의 믿음 전략같습니다. 그 전쟁에서 이긴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확실하게 자기들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질을 하며 고기를 잡으려고 그렇게 노력했지만 그 날 따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그 때 주님이 나타나셔서, 사실 주님은 이 때를 노리신 것이겠죠, 빈 그물을 정리하던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답니다. 사실 베드로는 그날 깊은 곳에도 그물을 던졌을 것입니다. 거기서도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다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는데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괜히 헛수고만 또 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지 모릅니다.  여러분 같으면 제가 깊은 곳에도 그물을 던져봤지만 거기도 오늘은 고기가 없습니다. 그만 두겠습니다. 이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그러고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졌는데, 뜻 밖에도 그물이 터질만큼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뭔가 교훈을 주기 위해 남겨두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 외엔 또 무엇입니까? 내가 실패했을 때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경험과 지식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일하다 빈손인 인생도 주님의 뜻을 받들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지할 것은 은혜이고 믿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은혜가 뭔지 제대로 이해하고 그 은혜를 의지하며 산다면 신앙생활이 확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은혜는 주님과 동행하는 현장의 체험을 통해 우리 몸에 스며들 것입니다. 신앙서적 몇 권을 읽었다고 해서 은혜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책 속의 간증은 믿음으로 내 이야기를 만들기 전까지는 그들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정복한 이야기도, 빈 손이던 베드로가 주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고기를 잡은 이야기도 오늘 우리 삶 속에서 믿음으로 나의 간증으로 바꿔놓지 않는한 그냥 감동적인 그들의 이야기로 끝날 것입니다.  여러분도 삶 속에서 줄거리는 달라도 주제는 같은 믿음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 바랍니다. 

믿음의 이야기는 주님과 함께 할 때 만들어집니다. 저는 지금 능력이 특출한 사람의 성공스토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모자라는 사람들을 통해 주님이 만들어 내시는 구원의 역사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고 믿음의 사람들로 우뚝 서기바랍니다. 사단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영혼을 구원하기 바랍니다. 빈손의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해서 주님을 위해 일하기 바랍니다. 지금 가진 내 힘과 능력에 실망하지 말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주님을 의지하고 나갑시다. 은혜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그런 역사를 이루실 수 있게 베드로처럼 순종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