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권태

종교적 권태

사랑하는 연인도 세월이 좀 흐르면 권태기를 맞이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만나고 보고 싶은 마음이 시들해지고 별 것도 아닌 일로 다투고 짜증을 낸다면 인식하지 못했어도 권태기에 빠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생활도 권태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주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예배를 드리고 나도 허전해서 뭔가 신나는 것을 찾는 그런 심정이라면 종교적 권태를 의심해봐야 합니다.

권태를 느끼는 것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이것은 하라 저것은 하지 마라’는 종교적 계율에 얽메여 사는데 지친 사람들은 권태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주님을 고백하며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에 권태감을 느낀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갈급해 더 기도하게 됩니다.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이적을 눈 앞에서 목도한 자들이었습니다. 멀쩡하던 홍해가 갈라져 바다속을 길처럼 건넜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고 바위에서 물이 터져나오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기적이 일어난다고 소문난 어느 집회나 교회도 이걸 능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자기들을 흥분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우상숭배에 빠져버렸습니다.

권태에 빠진 종교인들은 하나님만 예배하는 대신에 자기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교회로 들여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받으셨을까를 고민하는 대신에 우리가 얼마나 즐거웠고 위로받았는가에 더 신경을 씁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이끌기 보다 교인들을 즐겁게 만드는데 더 마음을 쓰는 것도 문제입니다. 토저는 다수의 교회들이 세상 것들을 가져와 자신들을 즐겁게 하는데 여념이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본래 기독교신앙은 세상에는 이질적인 것이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것입니다.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어떻게 다 알지 못하는 초월적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생기고 보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더 소중하게 여기며 살 수 있는지 참 신비스런 것입니다. 어떻게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경외함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기도하며 살아가는지 누구에게 이해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솔로몬의 화려한 성전도 지금은 무너져 없어지고 이방 사원이 그 위에 들어서 있고 겨우 통곡의 벽만 남아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하나님께서 화려한 교회당에 만족하시겠습니까,전문가들을 동원한 공연예배를 기뻐하시겠습니까? 누굴 위해 하려한 건물과 멋진 퍼포먼스가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것들보다는 깨어진 심령으로 주를 찾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성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 외엔 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했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 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를 즐겁게 해주는것이 있을 때 신앙생활도 즐겁고, 세상 것이 없을 때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즐겁지 않습니다. 매사 심드렁해져 어디 신나는 게 없을까 사방을 두리번 거린다면 권태에 빠져 있을지 모릅니다. 영적 권태를 극복하는 길은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